발해와 고려는 모두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기 때문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왕건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거란이 낙타를 선물로 고려에 보내며 친교의 의사를 전하지만 왕건은 낙타 50마리를 만부교에 묶어 전부 굶겨 죽입니다.
고려시기에 거란은 총 3번에 걸쳐 침입을 합니다.
1차 침입 때, 고려 관료들에게서 땅을 좀 떼어주고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자고 하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 때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서희입니다. 서희는 거란 장수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합니다.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를 계승했으며 북진정책으로 넓힌 땅을 거란에게 내놓으라고 합니다. 서희는 이에 반박하며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고 오히려 여진이 점거한 강동 6주를 달라고 합니다.
이는 서희가 그때 당시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는데, 고려가 거란의 뒤를 치지 않고 여진이 점거한 땅을 가지게 되면 거란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논리로 거란을 안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거란의 입장에서는 강동 6주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땅이었고 거란에 사대하는 조건으로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서희는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대하는 조건으로 강동 6주를 받아 냅니다.
이후에도 요에 사대하지 않고 강동6주도 반환하지 않고 송과의 교류를 하니 거란은 3차 침입을 합니다.
거란은 10만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옵니다. 이때 고려도 제대로 거란에 맞서 싸웁니다.
강감찬 장군은 20만 대군으로 침입에 대비를 합니다.
먼저 흥화진 전투에서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냇물을 막았다가 거란군이 도착하자 막았던 물을 내려보내 혼란을 일으킨 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거란군은 패하면서도 개경을 향해 계속 진군합니다. 그렇게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에 도달하지만 개경을 함락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퇴각합니다.
윤관이 이끄는 별무반을 중심으로 대규모 여진 정벌 계획을 통해 여진을 몰아내고 그 땅에 동북 9성을 축조합니다.
하지만 여진이 조공을 하겠다고 약속하여 고려는 1년여 만에 9성에서 철수합니다.
이후 여진은 힘을 키워 금나라를 세우고 더 이상 고려를 섬기지 않고 오히려 고려를 동생의 나라라고 여기며 고려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합니다.
이자겸의 난 직후 서경파가 금 정벌을 주장하자 당시 권력을 장악한 문벌 세력은 금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무신 정변이후 무신 정권이 안정될 무렵 13세기 몽골이 쳐들어옵니다.
당시 몽골은 인류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세계 최강의 나라였습니다.
몽골이 침입했을때 최고 집권자였던 무신 최우는 왕을 설득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항전합니다.
몽골은 사령관 살리타를 보내 고려를 침입하지만 처인성 전투에서 고려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면서 몇몇 전투에서 선전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몽골군은 이르는 곳마다 살육을 자행하며 그 사이 백성들은 막대한 희생을 당하고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어 죽는 일도 많아지며 고통이 커져갔습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원나라를 밀어내고 고려에게 공민왕이 수복한 철령 이북 지역을 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고려 조정은 매우 화가나서 최영이 요동정벌을 단행합니다.
하지만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는 명과 외교적으로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요동으로 가던 중 위화도에서 회군을 합니다.
이후 개경으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온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제거한 후 권력을 장악합니다.
위화도 회군 전 미리 손잡은 급진파 신진 사대부와 함께 이성계는 조선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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